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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소수서원(Sosuseowon Confucian Academy, Yeongju)의 역사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은 1543년 중종 38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입니다. 소수서원은 1541년(중종 36)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1542년(중종 37) 8월에 이곳 출신의 성리학인 안향(安珦)을 배향(配享)하는 사당을 설립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543년 8월 11일에 완공하여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같은 해에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주세붕이 서원 이름을 '백운동'으로 한 것은 소수서원의 자리가 중국 송(宋) 나라 때 주희(朱熹, 1130~1200)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있던 "여산(廬山)에 못지않게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이며,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백록동'에서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백운동서원이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48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퇴계는 1549년 1월에 경상도관찰사 심통원(沈通源)을 통하여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 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여"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소수'로 결정하고 1550년(명종 5) 2월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습니다.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조정에 의하여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됩니다. 사액을 내려 국가의 서원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서원이 갖는 중요한 기능인 서현의 봉사(奉祀)와 교화 사업을 조정이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소수서원 창립에 중요한 인물인 주세붕은 임백령이나 이언적 등의 도움을 받아 제향과 교육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서책을 사들여 서원 문고를 조성하였으며 주세붕 자신도 종종 서원에 들러 고을 선비들과 함께 성리학 강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주세붕이 처음 서원의 터를 닦은 뒤, 1546년(명종 원년)안향의 후손으로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이 경상도의 각 고을에 협조 요청하여 서원에서 일할 노비와 제수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고,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운영 규정을 정하여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와 원생의 정원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백운동 서원이 보유한 전답 30 결(9만 평)에 어장과 염분 및 보미(寶米)도 운영하게 되면서 서원은 토대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 소수서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 사회 활동에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어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서월철폐령을 내렸을 당시에도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서원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폐쇄되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1963년 1월21일 사적 제55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10일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영주 소수서원(Sosuseowon Confucian Academy, Yeongju)의 주요 공간
사주문(정문)
입구에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죽계 건너편 물가에는 취한대가 위치해 있습니다.
강학당(講學堂)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 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높았으며, 규모는 정면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면서도 고색이 잘 간직 되여 있으며, 사방 둘레에 너비 1m 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습니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높이 6.5cm, 높이 8.5cm의 턱을 두었고, 기단 네모서리에 추녀를 받는 활주를 설치하였습니다. 강학당의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 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수원(紹修書院)'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습니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을 2개 설치하였고, 기단 3면(정면, 우측, 좌 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습니다. 기둥 윗몸에서 양서 하나를 내어 기둥 위에 놓인 주두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에 평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받치고, 종보위에 파련 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습니다.
문성공묘
소수서원 문성공묘(紹修書院 文成公廟)는 소수서원 경내에 있는 안향 등 3인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 건물입니다.
규모는 정면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좌(柱座)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 주두를 놓고, 첨차를 내어 그 위에 소로가 주심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보 방향으로는 쇠혀(牛舌)를 내고 안쪽으로는 보아지 모양을 하여 퇴간의 보를 받치는 초익공식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구는 오량으로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마룻보를 받치고,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습니다.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습니다.
건물의 좌측과 뒷편에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사방 돌담을 두르고, 정면에 외단문을 설치하고 우측에 협문을 두었습니다. 매년 3월, 9월 초정일(初丁日) 날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주세붕이 직접 쓴 제향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홀기문서(笏記文書)가 전하고 있습니다. 서원의 양대 기능 중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매년 성대히 제향행사를 치르고 있고 건물도 잘 보존되고 있어 조선시대의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